말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진 소란스러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할까요. 네. 제 세상 말이에요. 당신 세상이 어떤지야 전 모르고요. 아무튼 전 너무 많은 소리가 들려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으면, 머릿속을 가득 메운 말들을 글로 잔뜩 쏟아내요. 고름처럼. 그래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편해지거든요. 보통 그 시간은 새벽이에요. 새벽이 아니어도 새벽처럼 느껴요. 수술 후 통증 때문에 잠이 도저히 오지 않던 날 새벽 4시 22분에는 이렇게 적었어요.
4시 22분. 자주 보네. 해피 버스데이, 나.
어릴 적에는 돌아다니는 차량 번호판 숫자를 모두 더하곤 했다. 2의 제곱수를 30제곱까지 외워 줄줄 읊고 다녔다. 세상에서 가장 긴 영단어 따위를 찾아 품고 다녔다. 비슷한 모양과 소리를 가진 단어 사이를 서투른 뜀박질로 이으려 들었다. 그건 말장난처럼 들렸겠지. 아재 개그이거나. 그만두진 않았으나 꺼내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 행동들에 딱히 의미가 있진 않았다. 내 세계엔 의미를 가진 것들이 바글거렸다. 의미가 너무 많아서 무의미했다. 너무 많은 게 둥둥 떠다녔다. 보통은 그 자리에 있지 않을 의미가 적절하지 않을 시간에 불쑥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내가 그걸 보여주면 당황스러워했다. 당황해줘서 고마워. 내가 보는 세계에 닿아줘서. 나는, 이곳에
항상 날고 있었다. 그러길 원한 건 아니었다. 땅이 내 자리가 아니었을 뿐이다. 하지만 몸은 땅을 디디고 자랐다. 자라는 몸을 본다. 오. 넌 모양 있는 세상에 사는구나. 그럴 수 있니? 대단해. 난 영원히 닿지 않는 허공에서 바글거리는 의미에 빠져 무의미하게 보글거릴 거 같아. 바글. 보글. 좋다. 네가 잘 가려주렴. 바글. 보글.
(...)
보글이니 빠글이니 뭔 소리야? 조금 더 과거로 가볼게요.
(...) 어릴 때부터 항상, 어딘가에 ‘깊숙이 맞물려 있을 순 없을 것’이란 감각이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여자들 사이에서도,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공동체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대학 학과에서도, 각종 세미나와 모임에서도, 운동 조직들과 인권 단체와 훈련소와 소방서와……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도.
어딘가의 온전한 일원으로 존재하진 못할 거란 감각. 나는 언제나 붕 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유감, 뭐라고 하든 간에, 그것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붕 떠 있는 나를 현실과 분리시켜 보기 시작했다. 연기하는 나와 흘러가듯 떠다니는 나로.
몸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상상을 종종 했다. 내가 바라는 몸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싫은 몸은 자각하기 시작한 뒤로는 거의 비슷했다. 흘러가듯 떠다니는 나는, 상상 속에서 그런 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하는 나는, 여전히, 타버린 피부와 지워지지 않는 흉터와 구부러진 사선과 구역질 나던 몸에 갇혀 있었다. 떠다니는 나는 연기하는 나를 조롱했다. <매트릭스 3>의 스미스가 눈먼 네오 앞에서, 구역질 나는 인간의 몸에 갇힌 자신을 보라며 인간을 조롱했던 것처럼.
처음은 MTF 트랜스젠더였다. 다음은 떠다니는 나처럼 정신없이 유동하는 정체성들이었다(사실 지향성은 정체성에 비해 명확했기 때문에 질문이 길어지지 않았다). 데미보이, 데미걸, 논바이너리, 젠더플루이드, 에이젠더…… 헤매다 지쳐 질문이 끝나지 않았단 의미로 정착한 퀘스처너리까지. 아니, 정착할 순 없었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라고 자책하는 내가 있었으니까. ‘너’는 항상 우유부단했고, 고민을 질질 끌면서 무엇이든 미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존재였다. 그래서 정체화의 길목조차도 너는, ‘가짜 퀴어’란 이름을 덕지덕지 붙여놓고야 마는 것이다.
이제 와서야 분명해진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스스로를 오롯이 ‘남자’로 여긴 적은 없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와 분리될 수 없고, 너를 비난하며 나를 일정 부분 정상성의 범주에 두고자 하는 일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비겁한 일이며, 나에게 명확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앞으로도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나는 그게 출발선이라는걸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제 안이 조금 소란스럽죠? 미안해요. 그 시끄러운 세상이 제게 어떻게 느껴졌는지 얘기하고 싶었어요. 내 자리가 어디에도 없다는 감각. 당연한 삶에서 벗어났고 당연한 모습일 수도 없으므로 내게 가능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감각. 대충 그런 거예요. 정제된 언어로 이야기하면.
전 제 몸이 집처럼 느껴져요. 당신은 집이 좋은가요? 어떤 모습이에요? 전 이놈의 집구석을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전 제 몸이 싫었거든요. 제 몸은 제가 머무를 만한 자리가 아니었어요. 바디 디스포리아dysphoria라고 하던가요? 성별 불쾌감이라는 말도 쓰고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이 집에 머물러 있으면 끔찍한 기분이 들어요. 아무 이유 없이. 누가 있어서 그런가? 없어도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 도망다녔어요.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이놈의 집구석이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면 떠나기 수월해질 줄 알았죠.
어…… 그렇진 않더라고요. 결국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면 제 몸에서 출발해야 해요. 당신 앞에 자리잡고서, 큼큼, 목을 가다듬고, 당신의 집구석은 어떤가요, 를 직접 물어야 해요. 제 목소리로요. 그러니 제가 이곳에 머무를 자격이 없는 거 같아도, 여기가 지긋지긋해도 어쩌겠어요?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고야 마는데. 그건 우리 가족도 그랬고요. 제가 사는 전주라는 동네도 그랬어요.
그러니 전 조각나고 말아요. 집구석에 둘 나, 집구석에서 벗어날 나, 문지방에 발 올리고 선 이도 저도 아닌 나(이거 외할머니가 진짜 싫어했어요, 복 달아난다고). 하지만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고 돌아오고 때려 부수고 고치고 넋을 빼놔도, 전 지금도 여기 살아요. |